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랍비 아키바
렉
2007. 11. 17. 14:21
랍비 아키바가 여행을 하고 있었다. 나귀와 개가 그의 동행이었고, 그는 작은 램프를 가지고 있었다. 날이 저물어 어둠의 장막이 내리자 아키바는 한 채의 헛간을 발견하고 거기서 자기로 했다. 그러나 잠을 자기에는 아직 이른 시간이었기 때문에 그는 램프에 불을 달아 놓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바람이 불어 등불이 꺼졌다. 그래서 그는 하는 수 없이 잠을 자기로 했다.
그가 잠자고 있는 동안, 여우가 와서 그의 개를 죽여 버리고, 사자가 와서 그의 나귀를 죽여 버렸다. 아침이 되자, 그는 램프만을 가지고 혼자서 터벅터벅 길을 떠났다. 마을에 이르러 보니, 사람의 그림자라곤 하나도 없었다. 그는 전날 밤 도둑떼가 이 마을에 쳐 들어와 집을 파괴하고 마을 사람들을 모두 죽여 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만일 램프가 바람에 꺼지지 않았더라면, 그도 도둑들에게 발견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만일 개가 살아 있었더라면, 개가 짖어대어 도둑들이 몰려왔을 것이다. 또 나귀도 소란을 피웠을 것이다. 결국 그는 이 모든 것을 잃어버린 덕분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랍비 아키바는 「사람의 최악의 상태에서도 희망을 잃어서는 안 된다. 나쁜 일이 좋은 일로 바뀌는 일도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는 진리를 깨달았다.
출전 : 읽으면서 치유한다. -심의학 연구소- . 정신문화사
랍비 아키바 (Rabbi Akiva)(AD 50-135)
아키바는 <탈무드>에 나오는 인물 중에서도 가장 존경을 받는 랍비이다. 또한 그는 유대 민족의 영웅이기도 하다. 젊은 시절 그는 큰 부잣집에서 양치기로 일했으며 그러한 생활은 40세가 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던 중 그 집 딸과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는데, 그 집 딸은 자기 아버지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혼을 강행하여 결국 그 집 딸과 아키바는 그 집에서 내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아키바는 집이 가난해서 학교에 가지 못했기 때문에, 일고 쓰기조차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문맹이었다. 이에 그의 아내는 아키바에게 공부할 것을 간청하였다. 이에 아키바는 늦은 나이에 어린 아이들과 함께 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그러나 13년 동안의 공부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그는 이미 당대의 우수한 학자 랍비로서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후에 그는 최초의 <탈무드> 편집자가 되었으며, 또 의학과 천문학에 조예가 깊었을 뿐만 아니라 여러 나라의 외국어를 잘하여 여러 차례 유대인을 대표하는 사절로 선출되어 로마를 다녀오기도 하였다. 아키바는 A.D.132년 유대인들이 로마의 지배에서 벗어나려고 반란을 일으켰을 때 그 반란운동의 정신적인 지도자가 되었다. 이 반란이 진압되자 로마인은 학문을 하는 유대인은 누구나 사형에 처한다고 공포했다. 그들은 유대인들이 책을 통하여 참다운 유대인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132년에 시작되어 135년에 진압된 제2차 로마를 향한 유대인 반란전쟁은 로마 황제 하드리안이 예루살렘에 새로운 로마도시(Aelia Capitolina)를 설립하고자 하였을 때, 바르 코크바(Bar Kochba)를 중심으로 열심당원들이 일으킨 전쟁이었다. 이 전쟁의 패배로 말미암아 팔레스틴에서의 종교적 자유와 민족주의는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고, 예루살렘은 전형적인 로마의 도시가 되고 말았다. 이후 하드리안 황제는 할례를 금하고, 예루살렘을 ‘아엘리아’(Aelia)로 개명하였으며, 성전 터에 주피터 신전을 건축하였다. 그리고 예루살렘에 출입하는 유대인을 사형시키는 엄명을 내렸다. 그 후 4세기경부터는 옛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에 의해서 솔로몬 성전이 파괴된 기념일인 아브월 9일(주전 586년 아브월 9일)에 서쪽에 남아 있는 성전 터에서 애도할 수 있도록 일년에 한 차례 출입이 허락되었다. 이런 연유로 서쪽에 남아 있는 성전 벽을 ‘통곡의 벽’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나 이 벽의 공식적 명칭은 ‘서쪽 벽’(히브리어로는 ‘코텔 마아라비’)이다. 이 날은 공교롭게도 주후 70년에 헤롯성전이 파괴된 날과 일치되었다. 오늘날도 그날이 돌아오면 유대인들은 하루 종일 금식하고, 구약성경 '예레미야의 애가'를 읽으면서 그 날의 역사적 의미를 잊지 않고 있다.
존경받던 랍비 아키바는 유대인 반란운동의 주동자로 몰려 처형당하게 되었다. 로마 군인들은 그를 십자가에 달아 죽이는 것은 너무 편안하게 죽이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에게 혹독한 고통을 주기 위해 땜인두로 온몸을 지져 죽이기로 했습니다. 아키바는 시뻘겋게 단 땜인두로 고문을 당하면서 아침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 광경을 지켜본 로마 사령관이 물었습니다. “그대는 이러게 호된 고통을 당하면서도 또 기도를 드리는 건가?” 이에 아키바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므로 이제껏 한 번도 아침 기도를 빠뜨리지 않았소. 더구나 지금 이렇게 죽음을 앞에 두고 기도드릴 수 있는 나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것은 이렇게 죽음을 당할 때에도 기도드릴 수 있는 나 자신에게서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였기 때문이오." 이렇게 말하고 나서 아키바는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그는 마지막까지 ”기도는 모든 경건의 초석이다"라는 자신의 주장을 지킨 인물이었다.
그가 잠자고 있는 동안, 여우가 와서 그의 개를 죽여 버리고, 사자가 와서 그의 나귀를 죽여 버렸다. 아침이 되자, 그는 램프만을 가지고 혼자서 터벅터벅 길을 떠났다. 마을에 이르러 보니, 사람의 그림자라곤 하나도 없었다. 그는 전날 밤 도둑떼가 이 마을에 쳐 들어와 집을 파괴하고 마을 사람들을 모두 죽여 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만일 램프가 바람에 꺼지지 않았더라면, 그도 도둑들에게 발견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만일 개가 살아 있었더라면, 개가 짖어대어 도둑들이 몰려왔을 것이다. 또 나귀도 소란을 피웠을 것이다. 결국 그는 이 모든 것을 잃어버린 덕분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랍비 아키바는 「사람의 최악의 상태에서도 희망을 잃어서는 안 된다. 나쁜 일이 좋은 일로 바뀌는 일도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는 진리를 깨달았다.
출전 : 읽으면서 치유한다. -심의학 연구소- . 정신문화사
랍비 아키바 (Rabbi Akiva)(AD 50-135)
아키바는 <탈무드>에 나오는 인물 중에서도 가장 존경을 받는 랍비이다. 또한 그는 유대 민족의 영웅이기도 하다. 젊은 시절 그는 큰 부잣집에서 양치기로 일했으며 그러한 생활은 40세가 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던 중 그 집 딸과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는데, 그 집 딸은 자기 아버지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혼을 강행하여 결국 그 집 딸과 아키바는 그 집에서 내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아키바는 집이 가난해서 학교에 가지 못했기 때문에, 일고 쓰기조차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문맹이었다. 이에 그의 아내는 아키바에게 공부할 것을 간청하였다. 이에 아키바는 늦은 나이에 어린 아이들과 함께 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그러나 13년 동안의 공부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그는 이미 당대의 우수한 학자 랍비로서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후에 그는 최초의 <탈무드> 편집자가 되었으며, 또 의학과 천문학에 조예가 깊었을 뿐만 아니라 여러 나라의 외국어를 잘하여 여러 차례 유대인을 대표하는 사절로 선출되어 로마를 다녀오기도 하였다. 아키바는 A.D.132년 유대인들이 로마의 지배에서 벗어나려고 반란을 일으켰을 때 그 반란운동의 정신적인 지도자가 되었다. 이 반란이 진압되자 로마인은 학문을 하는 유대인은 누구나 사형에 처한다고 공포했다. 그들은 유대인들이 책을 통하여 참다운 유대인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132년에 시작되어 135년에 진압된 제2차 로마를 향한 유대인 반란전쟁은 로마 황제 하드리안이 예루살렘에 새로운 로마도시(Aelia Capitolina)를 설립하고자 하였을 때, 바르 코크바(Bar Kochba)를 중심으로 열심당원들이 일으킨 전쟁이었다. 이 전쟁의 패배로 말미암아 팔레스틴에서의 종교적 자유와 민족주의는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고, 예루살렘은 전형적인 로마의 도시가 되고 말았다. 이후 하드리안 황제는 할례를 금하고, 예루살렘을 ‘아엘리아’(Aelia)로 개명하였으며, 성전 터에 주피터 신전을 건축하였다. 그리고 예루살렘에 출입하는 유대인을 사형시키는 엄명을 내렸다. 그 후 4세기경부터는 옛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에 의해서 솔로몬 성전이 파괴된 기념일인 아브월 9일(주전 586년 아브월 9일)에 서쪽에 남아 있는 성전 터에서 애도할 수 있도록 일년에 한 차례 출입이 허락되었다. 이런 연유로 서쪽에 남아 있는 성전 벽을 ‘통곡의 벽’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나 이 벽의 공식적 명칭은 ‘서쪽 벽’(히브리어로는 ‘코텔 마아라비’)이다. 이 날은 공교롭게도 주후 70년에 헤롯성전이 파괴된 날과 일치되었다. 오늘날도 그날이 돌아오면 유대인들은 하루 종일 금식하고, 구약성경 '예레미야의 애가'를 읽으면서 그 날의 역사적 의미를 잊지 않고 있다.
존경받던 랍비 아키바는 유대인 반란운동의 주동자로 몰려 처형당하게 되었다. 로마 군인들은 그를 십자가에 달아 죽이는 것은 너무 편안하게 죽이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에게 혹독한 고통을 주기 위해 땜인두로 온몸을 지져 죽이기로 했습니다. 아키바는 시뻘겋게 단 땜인두로 고문을 당하면서 아침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 광경을 지켜본 로마 사령관이 물었습니다. “그대는 이러게 호된 고통을 당하면서도 또 기도를 드리는 건가?” 이에 아키바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므로 이제껏 한 번도 아침 기도를 빠뜨리지 않았소. 더구나 지금 이렇게 죽음을 앞에 두고 기도드릴 수 있는 나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것은 이렇게 죽음을 당할 때에도 기도드릴 수 있는 나 자신에게서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였기 때문이오." 이렇게 말하고 나서 아키바는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그는 마지막까지 ”기도는 모든 경건의 초석이다"라는 자신의 주장을 지킨 인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