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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의 인터뷰 기사 스크랩

2007. 4. 29. 10:44

비(26)는 내 앞의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있었다. 지난밤 그는 일본에서 귀국했다. ‘월드 스타’는 자신의 얼굴이 그려진 전세항공기를 타고 끝없이 바깥으로 나가고 있었다. 일정은 송곳 꼽을 틈도 허용하지 않았다. 그의 스태프는 인터뷰를 둘러싸고 일정을 조정할 수 있는지에 대해 며칠간 회의를 했다고 한다. 마치 초여름이 된 것처럼 참으로 햇볕이 좋았다. 나는 처음 만나는 젊은 친구를 향해 이렇게 말을 걸었다.

―이처럼 햇볕 좋은 날에는 무얼 하고 싶지요?

“스쿠터 같은 작은 오토바이를 타고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거든요. 오늘도 한판 돌아다니고 싶었는데 스케줄이 있어서. 가끔 친구들 서너 명과 함께 시내에 타고 다니죠.”

―‘월드스타’가 스쿠터를 타고 막 돌아 다녀도 되나요?

“돌아다닐 때는 모자를 쓰고 다니기 때문에 사람들이 안 쳐다보죠. 가끔 들켜서 사인해 준 적도 있지만, 대부분 ‘설마 비 겠어’라고들 지나가지요.”

# 중2 때부터 매일 춤·노래만 생각

서울 청담동에 있는 그의 연예기획사 사무실로 가면서, 내 삶과는 명백하게 다를 ‘신생 종족’과 과연 무슨 말을 나눌 수 있을지 불안했다. 그가 푹신한 안락 의자에 다리를 오만하게 꼰 채 앉아 있을 것 같은 상상까지 들었다.

그런데 막상 그는 좁은 분장실에서 분칠을 하던 중에 나를 맞았다. 어설픈 자세로 꾸벅 인사를 했고, 처음 대면하는 그가 낯설지 않았다. 얼굴에는 아직 소년티가 남아있었다.

―그래 오토바이만 좋아하고, 노래와 춤은 별로 안 좋아합니까?

“노래와 춤은 매일마다 반복하기 때문에, 좋아한다기보다는, 이렇게 말하면 좀 이상할 지 모르지만, 어느 순간부터 삶의 일부분이 되어버렸어요.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춤추고 노래를 했으니 지금껏 12년쯤 된 셈이지요. 이제는 아무 의식 없이 하루 내내 노래를 흥얼거려요. 또 저는 모든 사물을 보면 저것을 춤으로 출 수 없을까 생각해요. 할아버님이 지팡이 들고 가시면, 지팡이로 춤을 만들 수 없을까? 차를 탈 때도, 차 타는 방법으로 무언가 춤을 만들 수 없을까? 계속 그렇게 무언가를 생각하거든요.”

사물이나 현상을 춤으로 파악한다는 것은, 세상을 글로써 먹고 살아온 내게는 충격이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무대에서 당신이 추는 모든 춤들은 당신의 창작품이었습니까?

“제가 거의 다 했지요. 도움을 청할 부분은 어느 정도 도움을 청하고요. 제가 거의 다 안무를 해요.”

―철모르던 시절에는 좋아서 춤추고 노래했지만, 일로서 하는 지금은 달라지지 않나요?

“연예인이라고 해서 제가 공인(公人)이라고 생각지 않아요. 공인의 의무감이 있었다면 춤과 노래를 계속 하는 것이 지겨웠을 수도 있었겠지요. 저는 단지 연예인이라는 좋은 직업을 가진 한 사람일 뿐입니다. 좋아서 노래하고 좋아서 춤을 추지요. 너무 행복한 것이 제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이죠.

물론 이것이 일이기 때문에 위기감은 있어요. 끝없이 노력해야 하고 무언가를 창조하고 개발해야 하니까요. 어느 순간 멈추다 보면 대중들은 저를 외면해버리고, 더 좋은 신인들, 루키들이 나왔을 때 밀려날 수 있다는 것이죠. 그럼에도 1·2년간 준비한 음악을 한꺼번에 폭발시키는 매력은 이루 말할 수가 없죠.”

―그러면 당신이 싫어하는 것은 무엇이지요?

“저는 먹는 것을 굉장히 좋아하는데, 싫어하는 것이 바로 스테미너 음식들이에요. 자라나 강아지들…. 어렸을 때 시골에서 이들이 비참하게 죽는 모습을 봤어요. 그것을 혐오식품이라고 얘기할 수는 없지만 제게는 부담스러운 음식이죠.”

―몸을 만들기 위해 닭가슴살이나 고(高)단백 음식을 먹지 않나요?

“닭가슴살은 먹습니다. 저는 때를 안 가리고 무조건 많이 먹습니다. 계속 움직이고 춤을 추기 때문에 칼로리 소비량이 많아요. 그때마다 무엇인가 섭취를 하고요. 눈에 보이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잘 먹습니다.”

―중 2때부터 거리에서 춤추고 노래했다고 했는데, 부모 속을 굉장히 썩혔겠군요.

“모든 부모님들의 심정은 자식이 좋은 학업을 이루고 또 좋은 대학교를 가서 좋은 직업을 갖는 것이잖아요. 아들이라고 하나 있는 게 밖에 나가서 언제 들어올 지 모르고, 귀에는 귀걸이를 하고 있지…, 부모님 속을 많이 썩혔지요.

한번은 아버님이 중국집으로 저를 데려가 탕수육을 시켜놓고, 고량주를 한잔 따라주시는 거예요. 중학교 2학년 때였어요. ‘이 잔을 네가 들이키는 순간 앞으로 술은 계속 마셔도 된다. 하지만 절대 도(道)와 덕(德)에 빗나가는 짓을 하지 말며, 담배도 피지 말아라. 그 약속을 지킨다면 앞으로 네가 술을 마시고 들어와도 뭐라고 안 하겠다. 집에 늦게 들어오는 것에 대해서도 말 안 하겠다’고 하셨지요.

얼마나 좋아요. 같은 또래 친구들은 술을 마시다 들켜 아버지한테 속된 말로 비 오는 날 먼지 나도록 맞잖아요. 그래서 저는 술잔을 비우며 ‘명심하겠다’고 했어요. 그 뒤로 주위 선배들이 담배 피라고 권유도 많이 하고 때리며 강요도 했지만, 저는 끝까지 담배는 안 피웠어요. 대신 술은 계속 마셨지만. 그리고 도와 덕에 어긋나는 짓이나 남에게 피해주는 짓을 하지 않았어요.”

중학생 때부터 술 마셨다고 아무렇지 않게 고백하는 그를 보고 있으니, 자식 키우는 부모로서 기분이 묘했다.

“이런 말씀을 드리기는 뭐하지만 폭탄주를 많이 마십니다. 40잔까지는 마셔요. 요즘은 워낙 바빠 마음에 맞는 사람이 있으면 두 달에 한번 정도 마시죠.”

―어떻게 아버지가 중학생 자식에게 술을 허락했을까?

“제 길을 이해해주신 것이었지요. 아버지는 사업에 실패하고 장사에도 망했지요. 우리 가족에게는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게 가장 크나큰 그날 하루의 목표였어요. 어린 나이였지만 부모님이 힘든 삶을 사셨다는 것을 몸 속 깊이 알고 있었어요. 그때 ‘내가 커서는 부모님께 먹고 사는 문제로 힘들게 만들지 말아야지, 앞으로 내 자식에게도 내 부인에게도 경제적으로 힘들게 하지는 않아야지’ 하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어머님은 안타깝게 제가 고3때 돌아가셨고요.”

# ‘월드 스타’는 아직 내 마음속 목표 

―어머님 생각이 많이 나겠군요?

그의 눈 주위가 붉어졌다.

“저는 어렸을 때 비행기 타는 게 소원이었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비행기를 너무 많이 타니까, 어머님을 한번 모시고 다녔으면 하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 가족은 한번도 우리 소유의 집을 가져본 적이 없었어요. 제가 집을 샀을 때 가장 많이 떠올렸던 분도 어머님이었어요. 어머님이 살아계셨으면 ‘우리 아들이 집 사줬다’고 동네방네 자랑을 했을텐데. 고생만 하시다가 정말 빛 한번 못 보시고 돌아가셨어요.”

―당신은 ‘월드스타’로 불려지지 않습니까? 작년 미국 뉴욕공연 때문에 그렇습니까?

“미국 공연도 그렇고, 타임지(誌)에서 뽑았던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 뽑힌 것도 작용됐겠지요. 하지만 ‘월드스타’는 대중들이나 언론종사자들이 그렇게 되라고 지어준 닉네임, 별명 같은 것이지, 사실 아직 월드스타는 아니죠. 그렇게 불리기에는 못 미치고 제 자신이 부끄럽죠.

그러나 월드스타라는 이름을 붙여주면서 새로운 목표가 생겼어요. 저는 아직 정식으로 미국에 진출하거나, 거기서 앨범이나 영화 활동을 하지는 못했어요. 제가 정말 노력을 해서 올해나 내년쯤 미국시장에서 큰 성과를 이루었을 때, 그때는 월드스타라고 불릴 수 있겠죠. 그 목표를 마음 속에 담아 두고 있어요.”

―중국과 동남아 쪽에는 통할 수 있겠지만, 과연 당신의 춤과 노래가 미국까지 먹혀들까요?

“제가 미국시장에 가서 우리도 너희만큼 할 수 있는 인물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거든요. 우리에게도 문화가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어요. 칼과 창을 든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이 사람들의 정신과 문화를 지배하는 것이지요.

# 미국서도 통한다는 것 보여 주고파 

제 스스로에게 주입하는 것은 ‘실패를 해도 성공같이’ 입니다. 설령 제가 미국에서 실패를 하더라도 그게 절대 실패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실패할 경우 그 실패 이유를 제 후배들에게 전해주면 돼요. 후배들이 이를 발판 삼아 또 도전하겠지요.

아시아를 돌아다녀보면 우리나라만큼 노래를 잘하는 사람이 없는 것 같아요. 우리 선조들은 민요를 창출해 냈고 거기에는 ‘꺾는’ 기교들이 있어요. 트로트도 사실 ‘꺾는’ 기술이 있잖아요. 그런 것으로 미국의 R&B(리듬 앤 블루스: 음악장르)를 누구보다 잘 소화할 수 있어요. 제가 한국에서 배웠던 창법과 스타일을 갖고 미국 최고의 프로듀서와 함께 일한다면, 제 노하우와 미국의 노하우가 합쳐지니 커다란 퓨전의 효과가 나타날 거예요.”

―외국공연에서는 영어로 노래를 많이 불러야 되잖아요?

“외국에서 부를 때 영어가 반 한국말이 반이에요. 중국어 일본어로 부를 때도 있어요.”

―언어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지요?

“어렸을 때 수학과 예체능 등을 좀 미뤄두고 영어 중국어 일본어만 꾸준히 배워볼 걸 이라는 생각도 많이 했어요. 언어가 되지 않으면 결코 그 본고장에서 성공할 수가 없어요. 왜냐면 그만큼 교류를 해야 하고 인터뷰를 하더라도 그쪽 언어로 해줘야 하거든요. 저는 지금도 영어를 계속 익히고 있어요.”

―내가 미국서 태어났더라면 더 좋았을 걸 이런 생각은 안 해봤습니까?

국에서 어떻게 태어났을지 잘 모르잖아요. 정말 안 좋은 할렘가나 혹은 부잣집 아이로 태어났을 수도 있는데, 그러면 제가 음악을 못 했을 지도 모르죠. 춤의 매력이 무엇인지도 몰랐을 것이고요. 저는 지금도 제가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이 굉장히 축복 받은 것임을 알고 있어요. 어렸을 때 남들한테 사인 해주는 것이 소원이었고 TV 한번 나가는 게 소원이었는데, 지금은 다들 찾아오잖아요.”

―연예인이 되기 전, 오디션에서 12번이나 떨어졌다면서요?

“18번이었어요.”


―당시 오디션에서 ‘얼굴이 이상하다’는 평을 받았다면서요?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오디션을 보러 다녔거든요. 그때만 해도 이목구비가 뚜렷한 사람을 굉장히 좋아했어요. 동건이 형(장동건)처럼 멋있는 분들이 연예인을 많이 했지요. 저는 연예인 하기에는 미성숙한 얼굴과 몸을 가졌다는 말을 굉장히 많이 들었지요. ‘쌍꺼풀 수술을 해라’는 얘기도 들었어요. 그래서 성형외과에 의뢰하러 갔는데, ‘자네 얼굴에는 안 고치는 것이 어울린다’고 해 실망해 그냥 돌아온 적이 있었지요. 여하튼 나름대로는 연예인 모습을 만들려고 이를 악물었죠. 몸 근육을 키우기 시작했고, 얼굴 살을 빼기도 했죠. 그러던 중 아는 사람의 소개로 고 2때 진영이 형(박진영)한테 오디션을 보게 됐지요. 진영이 형은 제 삶의 새로운 길을 열어주신 분이죠.”

―박진영 프로듀서를 안 만났으면 지금의 비는 어떻게 되어있을 것 같아요?

“비는 없겠죠.”

박진영이 지어준 예명 ‘비’가 없다는 것인지, 아니면 그 자신의 존재가 없다는 것인지 모호했다.

―그렇지만 ‘정지훈’(본명)이라는 젊은이는 있었겠지요?

“당시 저는 벼랑 끝에 선 사람이었기 때문에 도저히 밀려날 곳이 없었어요. 어머님의 병원비는 밀렸고, 돈은 없고, 차비도 없고, 제 밑으로 여동생도 있었기 때문에 제가 무엇이든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죠. 만약 제가 쥐였다면 내 앞을 막아선 고양이를 물고서라도 뛰어 나가야 되는, 도대체 숨을 데도 피할 데도 없었지요. 그렇지 않으면 벼랑에서 그냥 떨어져 죽는 길 밖에 없었거든요. 만일 여기서 떨어지면 더 이상 갈 곳이 없다는 절박감에, 오디션을 보는데 한번을 쉬지 않고 총 5시간 춤을 췄어요. 그렇게 해서 오디션에 붙었어요.”

―박진영씨는 왜 당신을 뽑았다고 했습니까?

“내 눈에서 배고팠던 게 많이 보였다고, 실력보다 열정이 보였다고, 이 아이가 이거 아니면 죽을 것처럼 보였다고, 나중에 말씀해 주시더라고요. 그때 마음가짐으로 아직도 쭉 활동하고 있어요.”

―그때 만약 안 뽑혔으면 다른 길로 갈 수도 있었을까요?

“대학로의 극단에 들어가거나…, 아마 그랬을 것 같아요. 제 인생에서 연기와 노래와 춤은 유일한 의미이자 저를 즐겁게 해주는 요소였어요. 이밖에 다른 선택을 할 수가 없었어요. 춤추는 저를 남들이 봐주는 것을 좋아했고, 연기하는 저를 남들이 봐주는 것을 좋아했을 뿐이에요. ‘나는 이만큼 했으니까 너희들 지켜봐라, 나보다 잘하면 나오라’는 식의 열정이 있었던 것이지요.”

―학창 시절 공부 잘 하는 학생들을 보면 부러웠습니까?

“너무 부러웠죠. 선생님께 칭찬 받고 부모님의 걱정을 끼치지 않잖아요. 그런데 저는 체질상 한 시간 이상 의자에 앉아 있지를 못해요. 그 시간을 겨우 견디면 거울을 보거나 동작을 연습하거나 음악을 듣거나 몸을 움직입니다. 시험공부 할 때도 계속 음악을 켜놓고 했거든요.”

―그러면서도 경희대(포스트모던음악 전공)에 들어간 것은 용한데요.

“진영이 형이 ‘너 대학 못 들어가면 가수 안 시키고 앨범 못 낸다’고 말씀했어요. 눈앞이 캄캄했어요. 수능이 102일 남았을 때였습니다. 서점에 가서 300 페이지쯤 되는 두꺼운 모의고사 시험문제지를 사왔어요. ‘하루에 3장씩 풀면 되겠구나’라고. 매일 3장씩 풀고 아예 문제까지 그냥 달달 외웠어요. 밥 먹을 때도 그걸 보고, 길 걸을 때도 보고, 춤 연습 할 때도 보고, 춤 연습이 좀 질리는 날에는 밤을 새서 봤어요. 그렇게 해서 대학에는 들어가게 된 거죠.”

―무명시절 가장 어려웠던 점은?

“오디션에 붙었지만 그것이 가수가 되는 길은 아니었어요. 진형이 형은 그 뒤 일주일에 한번씩 계속 오디션을 봤거든요. 불안했지요. 어느 날 진영이 형이 와서 짐 싸서 가라고 하면 어떻게 하지? 그만 포기하고 싶었어요. 하루에 몇 번씩 포기할까 말까 생각했었어요. 제 자신과의 싸움이었어요.”

―특히 주부 팬들이 당신에게 난리지요. 노골적으로 당신을 탐냅니다. 그럴 때 기분이 어떤가요?

“10대 아이들은 부끄러워서 제게 잘 못 다가오고, 20대 또래들은 사인을 해달라고만 하지요. 30~50대 팬들은 제 엉덩이를 두드려 주면서 열심히 하라고 말씀해 주세요. 든든한 후원자 같아요.”

―주부 팬들이 열광하는 그 몸매는 타고난 것입니까?

“저는 굉장히 빈약한 체질이었어요. 어렸을 때 초등학교 때까지 매일 맞고 다녔어요. 어느 순간 맞는 게 싫어서 합기도와 태권도를 배웠고 헬스클럽도 다녔어요. 고등학교 때부터는 의식적으로 몸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몸이 가장 큰 재산인데, 살면서 건강해야 하고, 또 언젠가는 사람들 앞에 섰을 때 정말 자신 있는 몸을 보여줘야겠다고 생각했었어요.”

―몸에 대한 투자를 많이 하는데, 정신에 대한 투자는 어느 정도 합니까?

“우선 그건 지식에 대한 투자인데, 그 전에는 그렇게 해야 할 이유를 몰랐어요. 그런데 이것도 생활 전선이라면 생활 전선이잖아요. 뭐든지 작은 거 하나라도 더 알아야 입으로 내뱉을 수 있고 몸으로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신문을 사면 시간이 없을 때면 사설만이라도 읽어보려고 해요. 사실 재미가 없죠. 정치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니. 이해하기 어렵지만 계속 읽다 보면 제게 도움될 것으로 생각은 해요.

사실 이런 지식보다는 외로움이나 우울함을 타지 않는 정신적인 건강이 더 중요하죠. 미국의 아티스트들이나 스포츠 스타들은 마인드 컨트롤을 해주는 정신과 상담을 받는다고 하더라고요. 저는 아직 이런 상담을 받을 만큼은 아니에요. 현재로는 제 정신 건강은 매니저들과 오토바이가 해결해 주고 있지요.”

―스트레스를 받으면 오토바이를 탑니까?

“그건 짧게 바람을 쐬는 편이고요. 정말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는 매니저들과 야외에 나가 축구나 족구 같은 운동을 하죠. 연예인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대부분 소통구가 없어요. 누구에게 비밀얘기를 했다가 새어나가면 망신당하죠. 어느 날 대문짝만하게 기사로 나올 수도 있고. 그러니 비밀얘기를 털어놓을 수 있는 정말 자기 사람들이 있어야 해요. 다행이 제게는 그런 사람들이 많거든요.”

―당신은 나이에 비해 어른스러운 것 같군요.

“연예계에서 10년 동안 있으면서 주위 여러분들의 행동을 지켜봤잖아요. 실수를 하더라도 작게 하는 실수가 있고, 그 실수가 작은 데도 크게 할 수 있어요. 그런 걸 공책에 메모해 놓고 심심하면 한번씩 펴봐요. 그렇게 하다 보니 가식이 아니라 몸에 배어 실수를 안 하는 거죠. 저도 여자를 많이 만나고 싶고 한때는 일탈도 해보고 싶었지요. 사람이라는 게 욕구가 있잖아요. 하지만 욕망을 참는 것은, 이런 것들은 나이가 들어도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을 거라고 보기 때문이죠. 지금은 일에 대해서만 열정을 불태우고 싶어요.”

―여자 친구를 만나는 것이 어떻게 나이가 들어서도 가능한가요?

“저는 사랑은 나이와 상관없다고 생각하거든요. 영화에도 나왔지만 늙은 나이에도 연애하는 경우가 있잖아요. 지금은 일이 너무 좋아요. ‘이제는 일이 어느 정도 됐구나’ 싶을 때는 여자친구를 사귈 수도 있겠지만요.”

―어떤 여자에게 끌릴 것 같나요?

“현명한 여자가 이상형이에요. 외형적인 것은 금방 질리게 되잖아요. 물론 예쁘면 좋지만. 그 아무리 예쁘더라도 서너 달 만나고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면 그 외형적인 것은 필요가 없어지는 거 같아요. 아버님한테 많이 배운 건데, 외형적인 여자보다는 현명한 여자를 만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을 많이 하셨어요.”

인터뷰를 하다 보니, 둘 중 누가 더 나이를 먹었는지 혼동이 됐다. 나는 무대 위 그의 노래를 모르고 그 화려함도 모르고 그 열광도 모르지만, 같이 얘기하다 보니 이 젊은 친구에게서 배울 것이 참 많다는 것만은 확실해졌다.

―노래방에는 갑니까?

“그럼요.”

―본인 노래를 부릅니까?

“자주 부르는 노래는 조용필 선배님의 ‘돌아와요 부산항에’와 이승철 선배님의 노래, 혹은 팝송을 부릅니다. 제 노래는 죽어도 안 부릅니다. 녹음을 하면서 몇 천번씩 부르는데….”

2007년 4월 25일 가수 비가 청담동 자신의 소속사에서 인터뷰하고있다.

[최보식기자 congch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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